한국 교육의 문제점 – 안에서 보는 경우


한국 교육의 문제점 – 안에서 보는 경우

사회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거의 모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최종적이고 근본적인, 동시에 항구적인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것이 교육이라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폭력, 중독, 혐오 등등 어느 하나 교육이 해결책으로 제시되지 않는 항목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사회가, 얼마나 사회적 합의와 교육을 통한 재생산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단면이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동시에 교육을 위한 해결을 말할 때는 그 조금의 변화를 위한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동시에 지적이 되곤 합니다.

올해는 유난히도 교육적인 이슈 (그걸 “교육 이슈”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가 강하게 표출된 경우라고 할 수 있고, 그 해법 역시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지만, 뭐가 되었든 지금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도 같습니다. 사회적 합의의 기본이 “공론화” 혹은 “필요성의 공감”이라고 한다면, 한국에서 교육만큼 여기에 부합되는 주제도 없을 것인데, 그 수많은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단순히 바보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한 때 그쪽에서 생각을 해오던 사람으로서 동시에 현재도 비슷한 세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의 시각에서 본다면, 한국 교육의 미래가 그리 밝아보이진 않습니다. 최소한 교육이 교육정책의 다른 말로 인식되고, 교육이 대입정책을 의미하는 한은 말이지요.

어느 나라든 상급학교 진학시 평가를 하지 않는 학교는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과 같은 과열 현상도 전세계적으로 있어야 하는게 아닐까요? 아니면 우리만 유독 그런 이유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교과서적인 의미에서 교육은 여러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평가”를 통해 이루어지죠. 우리가 아는 각종 시험들, 정시와 수시 논쟁, 학종 등의 영역에서 불거지는 파열음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에 더해 교육안에서의 평가의 의미, 줄여서 교육평가는 교육활동의 결과를 일정한 기준에 맞춰 재확인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교육평가는 여러가지 이유와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본질적으로는 학습자에게 제대로 교육적 효과가 전달되었는지 혹은 학습자가 교육활동을 통해 어떤 가치를 새로 만들어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의 결과의 단면이 우리가 흔히 아는 점수와 석차로 나타나게 되지요.

그 이후는 모두가 다 아는 것처럼 성적과 석차 (정성적 평가까지도 포함해서)를 기반으로 대학교 진학을 하게 됩니다. SKY라고 부르는 유명 대학을 포함해 전국의 모든 대학이 일렬로 서열화되게 되지요. 다시 말하지만 정성적 평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추운 겨울 합격자 발표 날에 부둥켜 안고서 이제는 고생 끝 행복이다, 내 세상에 왔다”고 소리치던 어느 가수의 노랫말에 자연스레 대학입시를 넣어서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 노랫만처럼 “이제는 고생 끝 행복이다, 내 세상이 왔다”라고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것도 저만은 아니었을 듯합니다. 이제는 최소한 “어떻게든 대학만 가면 된다”는 표현은 잦아들었지만 (어떻게든 대학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많아져서겠죠), 서열화되어 있는 대학이 존재하는 한 대학진학을 위한 단계라는 점에서 고등학교 교육은 입시라는 커다란 멍에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정성적 평가에 대한 불신으로 정량적 평가 (시험 성적 중심)으로 바뀐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켜 본다면 모든 사태의 근본은 “일렬로 늘어선 대학서열”과 여전히 “대학 간판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믿음일 것입니다. 혹자는 “한국 최대의 종교는 대학입시”라고 할 정도로 강한 토대를 갖고 있는 마당에 입시제도의 일부 규정을 바꾸는 것은 그 치열한 공방에 비해 얻는 것이 적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 해결책 역시 언제나 미진할 수밖에 없고 하나의 대책이 나오면 그 대책을 “우회” 혹은 “무력화” 그도 아니면 “유리하게” 바꾸기 위한 더 높은 차원의 시도가 고가의 “컨설팅”이라는 이름으로 횡행하게 되는 것. 우리 모두가 아는 바로 그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문제인 만큼 그냥 “지적질”만 하고 글을 맺는 무책임함을 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편으론 뭘해도 방법이 없는 이슈를 타파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아예 경기장을 우회하는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유학이나 이민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일 텐데요, 유학이나 이민은 그 자체로 또하나의 도전이고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최종적인 해결책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매년 수능 전 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올해는 제발 수능 때문에 자살하는 학생이 없기를”이라는 바람입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는데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런 아픈 뉴스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그것이 하나의 해결책을 암시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한번의 시험이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신앙”의 위세가 한 풀 꺾였다는 것이지요. 대학입시라는 종교가 가진 위세가 조금씩 금이 가고 있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론 “불확실성”이 증가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그 자체로는 긍정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또다른 한 편에서는 우리의 사회가 청소년들에게 “대학입시가 삶의 전부다”라고 잘못 가르쳤던 것들을 “교육을 통해서” 조금씩 완화시켜가고 있다는 증거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이 비록 이미 임계점을 넘어선 긴장감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정도의 효과라고 할 지라도 말이지요.

두번째 방법은 이른바 “입구”에서의 해결책이 아니라 “출구” 수준에서의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청년취업으로 대변되는 “제대로된 일자리”, 동시에 “적절한 임금”을 통해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길이겠지요. 이제 10년도 더 된 예전 글에서 (https://blog.naver.com/anima221/20065658853) “맥도날드 시급을 1만원으로 올리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혼자 주장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내용은 여전히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AI를 위시한 기술 발전으로 인해 “제대로된 일자리”는 필연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된 일자리를 늘리려는 노력과 동시에, 그런 일자리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을 한다면 대학입시를 어떻게 바꾸느냐와 상관없이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적재적소에 재배치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두번째 방법은 한정된 사회적 자원을 재분배하고, 그에 맞는 철학과 가치를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해야한다는 차원에서 진정한 의미의 “교육적 해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더 걸리고, 더 많은 토론이 있어야하고, 더 많은 진통이 있어야겠지만, 그런 걸 하라고 정치인을 뽑는 것이고, 그런 걸 하라고 국회든 정부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공동체”라는 인식에 대한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주변에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바꿔가면서 대표라는 사람들을 압박해나간다면 어쩌면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더 많이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조금 기대를 해봅니다. 우리가, 한다면 하는 민족이니까요. 전 국민이 교육제도에 관한 문제점에 집중하고 있는 이 시점이, 어쩌면 가장 좋은 시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를 해봅니다.

#교육문제, #학교교육, #학교교육정상화, #교육, #수능, #입시, #대학진학, #유학, #이민, #교육평가, #교육목표